etc.
지난 밤 뒷담화
봉금이
2010. 7. 22. 04:36
대화를 마치고 잠들기 전 갑자기 글을 좀 써야 겠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미치도록 지배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국내에서 개인의 스펙 또는 개인의 타이틀이라는 소주제로 얘기거리를 늘어 놓았다.
국내에서 디자이너의 현실이 디자이너가 가지고 있는 개인 스펙이 강해야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비판적 주제를 놓고 이야기가 이어져갔다.
이건 사실 어제 오늘 일도 아닌데 무슨 뜬금없는 것이냐, 꼭 스펙이 딸리는 애들이 현실에 대해
푸념하고 채념하고 실망하고 원망하는 자기비하를 사회로 돌리는 듯 패배자의식의 얘기로 흘러갈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앞으로 이어질 내용이 어떤 식으로 비춰질지 모르나 확실한건 자기비하는 아닌 디자이너가 바라는 세상에
대한 작은 소망, 희망일지도 모른다. 현실이 그렇다고 그것을 받아들여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한건 전세계적으로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넘어야 하는 또하나의 숙제이고 과제일 것이다.
이런 주제를 통해 우리는 정체해 있는 디자인을 한단계 더 성숙하게 만들수 있어야 하고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안고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같이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얘기는 한 여성 디자이너의 얘기에서 출발했다.
그녀는 출판업체를 통해 자신의 작업을 소규모로 제작하였다.
아무리 보아도 디자인이 잘되 보이진 않았던 모양이다.
나 역시 그 업체에서 나온 소규모 책자들을 직접보고 잘했다는 생각을 해 본적은 없다.
다만 이러한 개인 작업이 디자이너로서 당연한 임무이며 역할이라고 생각하면서
국내 그래픽디자인과 북디자인, 시각디자인분야가 발전할 것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이 더 앞어 있었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접근해 본다면 이러한 작업을 그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많은 디자이너들이 이러한 작업을 하고 있고 계획 할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떻게 그러한 작업물이 순수성보다 그녀의 스펙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관련 보도자료로 활용이 되는것인가가 우리 이야기의 핵심된 내용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앞에서 말한 개인적인 스펙이었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그녀는 수많은 프로젝트와 경력, 학력이 그를 뒷바침하고 있었다.
당연한 결과라고는 생각하지만 너무나 씁쓸했다.
꼭 그러한 것이 갖춰져야지만 언론의 관심을 받고 그들이 하는 작업물들이 가치있는 일인가?.
물론 그러한 작업들이 대규모의 생산을 통해 상업적 목적으로 진행된것이 아니지만
벌써 한 인간이, 한 디자이너가 상업성 논리에 접근해 있다는 사실이 벌써 힘빠지게 만든다.
그가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간에 그에 프로필은 언론의 외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인맥, 학력, 권력, 재력 이 네가지만 있으면
욕을 먹든 죄를 짓고 깜빵엘 가든 뭐든지 가능한 나라다.
사실 인간사회,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 네가지면 있으면 두다리 뻗고 잘 수 있다는 건 어린아이의 장래희망이
의사, 변호사, 대통령, 사장님이라고 말하는 것을 뿌듯해 하는 어른들의 나라가 아니던가.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걸 아이때부터 쇠뇌를 시키는 교육사회덕 아니던가.
뉘집 아이가 디자이너라고 하면 앙드레김부터 생각하는 저질스런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철저한 경제 조기 교육을 통해 만들어진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과 부자인 사람의
극심한 대비가 어중삥삥한 중간 계층을 만들어 그들을 돋보이게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든 아니든 이러한 중간계층과 하위계층이 그들을 두다리 뻗게 해주기 때문에
더 존경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렇지 못한것이 현실이다.
나는 광고하는 이제석이라는 사람을 남몰래 부러워하면서 존경했다.
개인적인 친분은 없지만 같은 학교 출신이고, 그가 이루어 놓은 업적(?)들이 후배들과 선배, 동기들,
그리고 지방에 있는 대학을 널리 알리며 같은 동문으로 자부심과 자긍심을 주는데 큰 일조를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창의적인 생각이 나를 자극 시키기에 충분했고, 상업적인 광고보다 공익적인 광고를 통해
디자이너가 가져야하는 다양한 시각과 관찰력을 정치, 사회, 문화, 환경 등의 사회적 문제를 비주얼 광고로 재해석함으로써,
사회적인 이슈를 광고로 표현하였다. 이미 그땐 내게 나이는 중요한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실제 나보다 3~4살이 어린 것으로 알고 있다. 나보다 어린 사람이지만 존경하고 부러워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해외 광고에서 수많은 상을 휩쓸며 국내 언론으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언론를 통해 지방대 출신으로 겪어야 했던 고충을 국외로 눈을 돌려야 했던 씁쓸한 얘기를 연신하며
국내 디자인계의 문제점 살포시 이야기 하기도 했다.
그러한 이야기는 당연히 지방대 출신들에게 있어 희망이었고 작은 불씨와도 같았다.
그는 마치 국내 디자인계의 혁명가 같기도 했고, 프론티어이기도 충분했다.
그런 그가 얼마전 미국에 예일대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 접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난 많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예일대는 분명 미국이 자랑할만한 명문대이다.
비교가 될 수 없고 하면 안되지만 모르는 분들을 위해 한국에서 디자인이나 회화를 하는 사람들이 홍대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좋은곳으로 평판이 나있는것처럼 한국의 홍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시 돌아와,
예술분야에서 이 학교의 명성은 대단하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래픽 디자인의 거장 폴랜드,
영화 오프닝의 대명사 카일쿠퍼 등 기라성같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강의하고 졸업을 했고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활동중에 있다. 미국내에서도 이곳의 명성은 우리가 각종매체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국내 역시 예일대 입학을 하기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그리고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나 역시 약각의 환상은 있다. 그렇다면 미국내에서 이 학교의 대한 평가는 어떨까? 물론 대단하다.
그들이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많은 곳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얼마전에 보았던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될까요?] 에서도 언급이 된다. 스칼렛 요한이 여주공으로 출연하는데 여기서 그녀는 남편 일본출장울 통해 일본에
머무르며 일어나는 사랑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녀의 남편은 사진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그런 그를 따라 그녀는 일본 호텔에서 따분한 여가생활을 하고 있다.
어느날 남편이 작업해준 예전 여가수를 만난다. 시종일관 떠들어대는 여자는 눈치도 없고, 시끄럽고,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그런 그녀를 스칼렛 요한슨은 맘에 들지 않는다. 헤어지는 로비에서 스칼렛 요한스는 남편에게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남편은 스칼렛 요한슨에게 왜 그렇게 부정적이냐며 그녀는 예일대 출신이다라고 하며 스칼렛 요한슨을 다그친다.
이부분에서 난 예일대라는 학교에 대해 생각을 해보아야만 했다.
그것은 마치 예일대라가 곧 출세의 지름길이며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 있었다.
예일대를 나오면 경망스런 행동에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미국내에서도 학력위주의 사람관계가 형성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그런 미국사회의 현실을 약간 비꼬는 뉘앙스를 풍긴다. 예일대에 관련된 이야기는 정치, 사회, 문화등을
해학적으로 풀어나가기로 유명한 만화 '심슨'에도 강아지를 예일대와 연관을 시켜 인간의 가치의 척도를 판단하는
기준을 암시하며 비판적인 시각으로 풀어가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난 이 만화를 보지 못했고 이야기만을 듣고 글을 쓴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심슨의 광적이 펜이라면 아! 하며 생각이 날것이라고 보고 일단 패스하겠다)
아마도 그들 나라에서도 여러 매스미디어나 출판물등에서 이러한 학력 관계자향성으로 인한 지적 빈부격차에 대한
사회적 의식의 비판이 종종 이야기꺼리로 거론은 되고 있나보다.
글을 쓰면서 자칫 예일대의 커리큘럼과 교수진들과 학교 운영상의 부정적적으로 비춰질까봐 걱정이 되는데
난 예일대 자체를 비판하려 하는 것이 아님을 명백이 해두는 바이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무슨 얘기를 하는것인지 잘 알것이며 극단적인 사고는 하지 않을거라 믿는다.
다시말하자면 예일대출신들이 사회에 진출하였을때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적인 평가가 극도로 지나친 지적 빈부격차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을뿐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미국이라는 나라자체가 상업적 구도로 이루어져 있고
그들의 예술과 디자인은 이상하게 구분이 들지 않을 정도로 심한 상업성을 띄고 있다. 아마도 그러한 사회적 문화가
교육현실에까지 영향을 끼친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사회는 분명 고학력이 필요로 하는 사회인것은 분명하다.
이제 서울에는 기본적으로 석사과정은 기본 타이틀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지고 있다. 나라가 작다보니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내가 알고 있는 모 교수님도 유럽에서 외국공부를 마치시고 한국에서 규모가 작은 벤쳐 중소기업 팀장이라는 직급과
시각디자인학과 시간강사를 병행하고 계신다. 시간이 되어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도중 그분도
현재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고 하신다. 역시나 한국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학력이라는 이야기는 빼놓지
않으시면서 내게도 될 수 있음 미국으로 나가기를 희망하지만 그 또한 어렵다는 것이 결론이기도 했다.
앞에서 언급한 이제석씨와 관련된 이야기로 좀 더 이야기를 풀어보려한다. 앞서 글말미에 예일대에 석사과정에
입학한 이제석씨가 어떤 생각으로 다음 행선지를 예일대로 향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름 사정이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몇년전 학교 특강을 위해 이제석씨가 학교를 방문했고 질의응답시간에 나는 이러한 질문을 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디자인 교육에 이바지 해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라고 질문했고 그의 대답은
가르치는 것은 전혀 관심이 없고 잘하지도 못하니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말을 했다.
그다운 생각이였고, 그렇게 말해주길 바랬었다. 시간이 몇년이 흘러 그의 생각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은 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른데 그 역시 이 한국사회에 어쩔 수 없는 현실에 타협한 결과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
너무 극단적인 생각일 수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제석씨가 다른 학교로 진학을 했더라면 이러한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석씨는 이러한 학력위주의 사회에서 큰 이슈의 대상이었고 그러한 벽을 뛰어넘어
미국에서 성공을 기약했고, 현지에서 많은 기대와 가능성을 우리에게 전해주었고, 국내 역시 광고 천재라는
수식어까지 붙어주었다. 고학력이 아닌 오직 실력만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였다. 그런 그가 한국에
이제석 광고 연구소를 차림과 동시에 예일대 진학을 한것이다.
무엇이 그를 예일대로 이끌었을까? 광고 연구소까지 열고 한국 광고계를 개편하고 또 전세계적인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인가? 아님 좀 더 자기 자신을 위해 새로운 사람들과 일상의 자극제가 필요했던 것일까?
무엇이 되었든 간에 스스로에겐 타이틀이 필요한건 사실이다.
주객전도
나는 이글이 사실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 이밖에도 어떠한 학문이든 상관없이
학문에 매진하는 사람,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 꿈을 가진 사람, 사회관련 NGO, NPO 등을 생각하며 글을 써내려 갔다.
어떠한 것이든 목적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우리는 법정스님의 책에서 이러한 교훈을 많이 얻을 수 있다.
한 스님의 이야기다. 스스로를 포기하고 목적을 잃은 한 스님의 이야기가 있다. 그런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개인적인 법 공부에 박차를 가했고 주변의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고 제자들도 생겼다. 시간이 흘러 노세한 그를
하나둘씩 떠나고 심지어 왕따까지 시키는 일까지 일어났고 그러한 변화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그는 그렇게 남을 의식하며 자기 자신의 목적을 잃고 말았다.
어떠한 경우에서도 학력이 우선이 될 수 없다. 학력이 높다고 지적수준과 자신의 환경이, 위치가 당신의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않는다.
그러한 물질적, 정신적으로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한자리를 차지하고 남들을 의식해 자신의 부르주아가 되고 양반이
되는 것이 아니다. 늘 얘기하는 것이지만 이런 사회가 우선 문제를 야기 시킨다. 영어만 공부해야하고 내 자식이 남보다
잘나야하고 남이 하는 거, 다른 사람이 가진거, 나도 가지고 해야 스스로를 만족하고 뒤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만드는
획일화된 사회가 문제가 된다. 그러다 보니 학력위조가 나오고 성형이 나오고 자신이 자신이 아니고 다른 사람앞에 당당히
설수 없어 내가 아니 또다른 나로 살아가야 하며 자신을 잃어가는 자아분열이 일어나고
개인화가 심해지는 자기중심적 사고의 현상이 생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런것이 아니지만
사회를 주도해 나가야 하는 사람들은 똥인지 된장인지 정도는 알아야 하는 사람들이 이끌어 가야하지 않겠나?!!.
언론에서 만들어지 스타들은 언젠가 무너지고, 언론의 과장된 기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진실을 왜곡하고 영향을 미치는지
우리는 잘 알면서 실제 현실에서 그러한 도를 지킬 수 없는 나약한 인간, 비겁한 인간을 양성하고만 있다.
또한 그런 사탕발림과 자극적이고 호기심에 가득찬 기사가 0.1%가 밖에 되지 않는 현실을 100%로 가능한 것처럼
꾸며내는 소설 또한 위험한 사고와 사건을 만들어 낸다.
이것저것 생각하고 정리하는 스타일이 아닌 비선형적인 사고로 글을 쓰다보니 길(목적)을 잃은것 같기도 한데
정리를 차근찬해본다면, 한자로 학력은 배울 學, 가르칠 學자와 지날 歷와 책력 歷자를 쓴다.
이말의 의미가 배운것을 잘 활용하라는 것이긴 한데 책력은 편법아니고 진실되고 오래동안 쌓아온
경험과 사실만으로 기록하여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고학력자들은 그들만의 리그만이 우월하고 영향력있고 가치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늘 겸손하고 연구하고
공부하는 자세가 우선이지 않을까? 우리가 경험한 지식을 학문적으로 새로이 찾고 기록하고 가치있게
유용하게 쓰이기 위해 단체를 만들어 배우고 가르치는 곳이 학교라는 큰 집단을 형성한다.
이것이 더이상 변질되지 않고 자기 성공에만 눈이 멀어 엉뚱한것으로 타락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